'성장' 대신 '축소'를 선택한 도시들

'성장' 대신 '축소'를 선택한 도시들
Photo by Reagan Freeman / Unsplash

도시계획의 오랜 불문율은 '성장'이었습니다. 인구가 늘고, 새 도로가 뚫리고, 신도시가 지어지는 것만이 도시가 살아남는 길이라고 믿어왔죠. 지방소멸 위기 앞에서도 우리 지자체들이 기업을 유치하고 인구를 늘리겠다며 '장밋빛 청사진'을 놓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저성장과 인구 감소가 고착화되면서, 기존의 문법을 완전히 뒤집은 도시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불가능한 '성장'에 매달리는 대신, 도시의 쇠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현명하게 작아지는 법, 이른바 '스마트 디클라인(Smart Decline)' 전략을 택한 것입니다.


미국 영스타운: 유령 마을을 숲으로 덮다

미국 오하이오주의 철강 도시 '영스타운(Youngstown)'은 스마트 디클라인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꼽힙니다. 1950년대 17만 명에 달했던 인구는 철강 산업의 몰락과 함께 6만 명대까지 곤두박질쳤습니다. 도시는 빈집과 버려진 공장으로 뒤덮였고, 범죄율은 치솟았습니다.

과거의 영광을 되찾겠다며 헛된 재건 프로젝트에 예산을 쏟아붓던 영스타운은 2005년, '영스타운 2010'이라는 파격적인 계획을 발표합니다. "우리 도시는 더 이상 17만 명의 도시가 아니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입니다.

그들은 인구를 늘리는 대신 '도시의 덩치'를 인구에 맞게 줄이기 시작했습니다.

  • 외곽의 버려진 주택 4천여 채를 과감하게 허물었습니다.
  • 빈집이 철거된 자리에는 공원과 도시 농장을 조성했습니다.
  • 텅 빈 외곽 구역은 아예 수도와 전기 공급을 끊어 인프라 유지 비용을 극적으로 줄였습니다.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유령 도시 같았던 외곽이 녹지로 변하자 남은 주민들의 삶의 질이 올라갔고, 불필요한 인프라 유지비가 줄어들면서 도시 재정은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덩치는 작아졌지만, 훨씬 건강하고 단단한 도시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독일 알테나: 외곽을 지우고 중심을 채우다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의 소도시 '알테나(Altena)' 역시 비슷한 길을 걸었습니다. 1970년대 3만 2천 명이던 인구가 1만 7천 명 수준으로 반토막 나자, 알테나 시는 '압축 도시(Compact City)' 전략을 꺼내 들었습니다.

white and brown concrete building on top of hill
Photo by Evgeni Tcherkasski / Unsplash

알테나는 영스타운처럼 도시의 외곽 기능을 도심으로 끌어당겼습니다. 산 중턱이나 외곽에 있는 빈집과 낡은 아파트를 시에서 매입해 철거하고, 그곳에 살던 소수의 주민들을 인프라가 잘 갖춰진 도심으로 이주시켰습니다.

분산되어 있던 주민들이 중심부로 모이자 텅 비어있던 상권이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습니다. 시는 외곽 인프라를 유지하는 데 쓰던 예산을 도심의 복지 시설과 문화 공간을 확충하는 데 집중 투자했습니다. '넓게 퍼진 빈곤' 대신 '밀도 높은 풍요'를 선택한 알테나는 독일 내에서 가장 성공적인 도시 재생 사례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잘 작아지는 법'을 고민해야 할 때

우리의 지방 도시들은 여전히 거대한 메가시티를 꿈꾸며, 텅 빈 유령 공항을 짓고 예타 면제 도로를 뚫는 데 천문학적인 세금을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청년들이 떠나고 빈집이 늘어나는 지금,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지도 위의 영토를 넓히는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을 더 쾌적하게 만들고, 유지할 수 없는 인프라는 과감히 덜어내며, 행정과 자본을 중심부로 밀도 있게 모으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팽창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이제는 헛된 희망 고문을 멈추고, 어떻게 하면 '우아하게 작아질 수 있을지' 그 뺄셈의 지혜를 데이터로 증명해야 할 때입니다.

Read more

무인 매장 속 유리 상자, 게임일까 도박일까?

무인 매장 속 유리 상자, 게임일까 도박일까?

요즘 우후죽순 생겨나는 무인 인형뽑기 매장. 그곳을 지나다 보면 유독 눈에 띄는 풍경이 있습니다. 기계 앞에 바짝 붙어 집게의 움직임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어린 학생들의 모습이죠. 천 원짜리 지폐를 쉴 새 없이 밀어 넣으며 "이번엔 진짜 뽑을 수 있었는데!"라고 아쉬워하는 아이들을 볼 때면, 문득 서늘한 질문이

"아깝다, 거의 다 왔는데!" 뇌를 속이는 '근접 오류 효과'

"아깝다, 거의 다 왔는데!" 뇌를 속이는 '근접 오류 효과'

로또 번호 6개 중 5개가 맞고 마지막 하나가 어긋났을 때, 혹은 주식 매수 타이밍을 간발의 차로 놓쳤을 때 우리는 깊은 아쉬움을 느낍니다. 이성적으로는 단 하나의 번호만 틀려도 당첨금은 천지 차이인 명백한 '실패'지만, 우리의 뇌는 이를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근접 오류(Near Miss) 효과'라고

0%의 배신, 확률형 아이템은 왜 법의 심판대에 올랐을까?

0%의 배신, 확률형 아이템은 왜 법의 심판대에 올랐을까?

온라인 게임의 '확률형 아이템(Loot Box)'은 오랫동안 게임사들의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습니다. 돈을 내면 확정적으로 아이템을 주는 것이 아니라, '좋은 아이템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파는 비즈니스 모델이었죠. 지금은 모든 확률을 의무적으로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룰이 되었지만,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상황은 전혀

인간관계에도 가지치기가 필요하다

인간관계에도 가지치기가 필요하다

3월입니다. 새 학기, 새 부서, 새로운 모임. 봄의 시작은 늘 낯선 인사와 새로운 만남으로 북적입니다. 하지만 새로 저장되는 연락처가 늘어날수록, 휴대전화 주소록 아래로 조용히 밀려나는 이름들도 생겨납니다. 한때는 매일 일상을 나누었지만 이제는 명절에나 겨우 안부를 묻고, 결국 그마저도 뜸해진 인연들. 우리는 종종 조용히 멀어진 관계를 떠올리며 미안함이나 씁쓸함을 느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