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등이 너무 많은 세상

1등이 너무 많은 세상
Photo by Ben Soyka / Unsplash

출근길 지하철 스크린도어, 스마트폰 배너, 유튜브 광고까지. 우리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1등'이 넘쳐납니다. "압도적 1위", "소비자 만족도 1위", "판매 1위의 신화".

이상하지 않나요? 세상은 온통 1등 기업뿐, 정작 2등은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직감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 화려한 왕관 아래 어딘가에 깨알 같은 글씨로 '단서 조항'이 붙어 있을 거라는 사실을요.

하지만 알면서도 숫자의 권위에 잠시 흔들리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오늘은 기업들이 숫자를 빌려 스스로 왕관을 쓰는 방식,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나만의 기준'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가장 사랑받는' 항공사의 엉뚱한 증명

"세계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항공사(The World's Favourite Airline)."

white and red UNK airplane under blue sky during daytime
Photo by Isaac Struna / Unsplash

과거 영국항공(British Airways)이 자랑스럽게 내걸었던 슬로건입니다. 하지만 경쟁사였던 버진애틀랜틱항공(Virgin Atlantic)은 이 문구에 제동을 걸었습니다. "승객 만족도 조사 등을 보면 당신들은 1등이 아닌데, 왜 거짓말을 하느냐?"라며 광고심의위원회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죠.

심의 결과는 어땠을까요? 놀랍게도 영국항공의 승리였습니다.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영국항공이 "국제 승객을 가장 많이 운송했다"는 데이터를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이 발견됩니다. 영국항공은 '사랑받는(Favorite)'이라는 감성적인 단어의 정의를, 고객의 만족도가 아닌 '가장 많은 머릿수'라는 물량의 데이터로 치환했습니다. 그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사랑'의 정의를 자신들이 이길 수 있는 방식으로 바꿨을 뿐입니다.


이길 수 없다면, 이길 수 있는 판을 만들어라

이러한 전략은 오늘날 더 정교해졌습니다. 소위 '체리피킹(Cherry Picking)'입니다. 전체 데이터 중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쏙 골라내는 방식입니다.

"교육 업계 압도적 1위"라는 문구 아래에는 '2024년, 서울 강남 지역, 20대 남성 재구매율 기준' 같은 좁디좁은 조건이 숨어 있습니다. 전체 시장에서 1등을 할 수 없다면, 1등을 할 수 있을 때까지 범위를 좁힙니다. 마치 마라톤 대회에서 전체 순위가 아닌, '30대 직장인 중 안경을 쓴 사람' 부문 1위를 하고서 "나는 1위 러너다"라고 외치는 것과 같습니다.

기업들은 알고 있습니다. 거대한 시장 전체에서 승리하기란 어렵다는 것을요. 그래서 그들은 자신만의 기준을 만듭니다.

"어떤 회사에게 1등이란 가장 많은 고객을 의미한다. 어떤 회사에게는 가장 뛰어난 수익이나 주식 성과를 뜻한다. 또 다른 회사에게는 최다 직원 수 혹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지점을 보유한 것이 1등일 수 있다."

비즈니스에는 축구 경기처럼 정해진 '종료 휘슬'이 없습니다. 하지만 기업들은 불안합니다. 그래서 자꾸만 이 끝없는 경쟁 속에 인위적인 결승선을 긋고 싶어 합니다. 자신이 승자로 보일 수 있는 자의적인 기준을 세우고, 그 안에서 '우리가 이겼다'고 선언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마주하는 수많은 '1등'의 실체입니다.


숫자가 아니라 '나'를 믿는 연습

그렇다면 우리는 이 홍수 속에서 어떻게 중심을 잡아야 할까요? "판매 1위", "국민 1위"라는 말은 얼핏 '가장 좋은 제품'이라는 뜻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그것은 '가장 많은 사람이 무난하게 선택한 평균값'이라는 뜻에 더 가깝습니다.

우리는 모두 평균이 아닌 고유한 개인입니다. 누군가에게는 '가장 많이 팔린(1위)' 의자보다 '내 허리에 딱 맞는(순위 밖)' 의자가 명품입니다. 영국항공이 '가장 많은 승객'을 1등의 기준으로 삼았을 때, 누군가는 '맛있는 기내식'이나 '친절한 승무원'을 기준으로 다른 항공사를 선택했을 것입니다.

기업이 정해둔 '1등의 기준'에 내 선택을 위탁하지 마세요. 그들의 성적표를 검사하는 선생님이 되려 하지 말고, 내 욕망을 채점하는 심사위원이 되어야 합니다. "남들이 많이 샀나요?"라고 묻는 대신 "내 기준에 부합하나요?"라고 물을 때, 숫자의 권위는 힘을 잃습니다.


우리는 묻습니다

수많은 기업이 당신에게 데이터를 들이밀며 "우리가 정답"이라고 외칩니다. 하지만 질문의 권리는 소비자에게 있습니다.

  • "당신들이 말하는 1등의 기준은, 우리(소비자)의 기준과 같습니까?"
  • "그 숫자는 나의 만족을 대변합니까, 아니면 그저 다수의 선택을 보여줍니까?"

기업이 보여주는 거울(데이터)은 그들이 가장 예뻐 보이는 각도로 세팅되어 있습니다. 그 거울 밖의 진짜 풍경을 확인하는 것은, 결국 데이터를 읽는 우리의 몫입니다.

※ 에디터의 노트: 오늘의 뉴스레터는 사이먼 시넥의 책 <인피니트 게임(The Infinite Game)> (세계사 출판사)에서 영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저자는 비즈니스를 '승패가 없는 무한 게임'으로 정의하며, 끝없는 게임 속에서 무리하게 승리를 선언하려는 태도가 어떻게 왜곡된 지표를 만들어내는지 통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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