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가 선택한 단어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연말이나 연초에 '경영 목표'나 '사업 계획서'를 받아봅니다. 회사가 앞으로 어디에 돈을 쓰고, 어떤 사업을 키우고, 무엇을 구조조정할지 적혀 있는 문서죠. 이 종이 한 장에 내년 내 연봉과 팀의 운명이 달려 있기에 우리는 꼼꼼히 읽습니다.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 대통령은 정기적으로 의회와 전 세계를 향해 "앞으로 4년 동안 미국은 세상을 이렇게 다루겠다"는 거대한 계획표를 발표합니다. 이것이 바로 국가안보전략(National Security Strategy, 이하 NSS)입니다.
최근 트럼프 행정부가 2025년판 국가안보전략(NSS)를 발표했습니다. 전 세계 언론은 "미국이 변했다"며 떠들썩합니다. 하지만 웬즈데이터는 복잡한 외교적 수사 대신, 좀 더 직관적인 방법을 택했습니다.
바로 '단어의 개수'를 세어보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말실수에서 드러나지만, 국가의 진짜 의도는 반복해서 쓴 단어에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2022년 바이든 정부의 계획표와 이번 2025년 계획표를 나란히 놓고, 어떤 단어가 사라지고 어떤 단어가 그 자리를 채웠는지 비교해 보았습니다.
'민주주의'가 떠난 자리에 '계산기'가 앉았습니다
두 개의 보고서에서 가장 극명하게 엇갈린 단어는 바로 '민주주의(Democracy)'입니다.
지난 2022년 바이든 보고서에서 '민주주의'는 무려 98번이나 언급됐습니다. 미국 외교의 핵심은 "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하는 나라들과의 연대"였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번 2025년 보고서에서 민주주의는 단 8번 등장합니다. 사실상 소멸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빈자리를 무엇이 채웠을까요?


바로 돈입니다. '비용(Cost)'이라는 단어의 사용량은 3배 이상 급증했습니다.
데이터가 말해주는 변화는 단순합니다. 이제 미국에게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를 지키는 명분'이 아니라, '미국에 이익이 되는가'입니다. 보고서 전반에 깔린 뉘앙스는 "미국을 위해 너희는 얼마를 내놓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지도에서 지워진 이름들, '북한'과 '기후'
한국 독자들에게 가장 섬뜩한 데이터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북한(North Korea)'과 '비핵화(Denuclearization)'의 언급 횟수입니다.
지난 수십 년간 미국의 안보 보고서에서 북한은 늘 '심각한 위협'이자 '최우선 해결 과제'로 문서의 상단을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보고서에서 북한 관련 단어는 '0회', 즉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이는 평화가 아니라 '방치' 혹은 '각자도생'의 신호입니다. 미국 본토를 직접 위협하지 않는 한, 한반도 문제에 더 이상 막대한 외교적 자산과 돈을 쓰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라진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기후(Climate)'입니다.
지난 2022년 보고서에서 49번이나 언급되며 안보의 핵심축이었던 '기후'는 이번 보고서의 주요 키워드에서 자취를 감췄습니다. 대신 그 자리를 꿰찬 단어는 '에너지(Energy, 20회)'입니다.
이것은 명확한 선언입니다. 탄소 중립을 위해 비용을 지불하는 대신, 화석 연료를 태워 당장의 국익을 챙기겠다는 것입니다. ESG 경영을 준비하던 우리 기업들에게, 그리고 에너지 전환을 준비하던 국가 예산에 또 다른 의미의 청구서가 날아든 셈입니다.
세계(Global) 대신 서반구(Western Hemisphere)
마지막으로 주목한 것은 지리적 범위를 나타내는 단어들입니다.
바이든의 보고서가 '세계(Global, 106회)'와 '국제(International, 92회)'를 강조하며 전 지구적 개입을 이야기했다면, 이번 보고서에서는 이 단어들이 대폭 줄어들고 '서반구(Western Hemisphere)'와 '국토(Homeland)'라는 단어가 부상했습니다.
이 단어의 변화는 '먼로 독트린(Monroe Doctrine)'의 21세기 버전을 예고합니다. "유럽과 아시아의 복잡한 싸움은 너희끼리 해결하라. 우리는 우리 땅(아메리카 대륙)만 확실히 챙기겠다."
이것은 미국이 사실상 '세계 경찰'의 배지를 반납하겠다는 선언과 같습니다. 수출로 먹고사는 대한민국에게, 무역로를 지켜주던 거대한 경호원이 사라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제 남중국해를 지나는 화물선의 안전도, 불안한 안보 환경도 오롯이 우리의 예산과 세금으로 감당해야 할 몫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묻습니다
키워드 데이터는 명확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바이든이 공식 명칭인 'PRC(People's Republic of China)'를 쓰며 격식을 차릴 때, 트럼프는 'China'라고 직설적으로 부르며 '힘(Power, 31회)'을 강조합니다. 외교적 수사는 걷어치우고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태도입니다.
- 우리는 여전히 미국을 '조건 없는 혈맹'으로만 믿고 있지는 않습니까?
- '기후 위기 대응'과 '한반도 비핵화'라는 글로벌 과제가 미국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을 때, 우리는 홀로 그 비용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이 보고서는 먼 나라의 외교 문서가 아닙니다. 앞으로 우리가 국가라는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치러야 할 비용이,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 될 것임을 예고하는 '청구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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