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버린 에너지소비효율등급의 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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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버린 에너지소비효율등급의 시계
Photo by Dewi Karuniasih / Unsplash

여름이 되면 누구나 에어컨 리모컨부터 찾습니다. 하지만 시원함 뒤에는 늘 전기요금 걱정이 따라붙죠. 그래서 가전을 살 때 자연스럽게 확인하는 것이 바로 에너지소비효율등급입니다. 1등급이면 안심, 5등급이면 불안하다는 식이죠.

그런데 문득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에너지소비효율등급의 기준은 기술의 발전에 발맞춰 따라가고 있을까요?


급히 감긴 태엽, 뒤늦게 맞추는 기준

기술은 해마다 개선됩니다. 냉방 효율이 높은 인버터 압축기, 더 두꺼운 단열재, 스마트 제어 기술 덕분에 같은 성능을 내면서도 소비 전력은 점차 줄어들었습니다. 문제는 이 속도를 등급 기준이 따라잡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에어컨입니다. 개정 직전인 2018년에는 시판 제품의 89%가 1등급을 받을 정도로, 사실상 대부분의 에어컨이 ‘최고 효율’ 딱지를 달고 있었습니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변별력이 사라졌고, 효율 등급은 ‘믿고 고를 수 있는 기준’이 아니라 단순한 장식이 되어버렸습니다.

데이터 출처: 한국에너지공단

뒤늦게 2018년 정부는 냉방 효율 측정 기준을 강화했습니다. 그 결과 1등급 제품 비중은 단 1%대로 급락했고, 대부분이 3~5등급으로 재분류되었습니다. 문제는 이 조정의 강도가 지나쳤다는 점입니다. 기업들이 새 기준을 충족하는 제품을 개발해 내놓는 데만 3년 가까이 걸렸고, 그제서야 1등급 제품이 10%대 후반으로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즉, 제때 손보지 않으면 모두가 1등급이 되고, 뒤늦게 강화하면 시장 충격이 커집니다. 필요한 것은 꾸준하고 발맞춘 조정이지, 극단적인 뒤늦은 개편이 아닙니다.


움직이지 않는 초침, 바뀌지 않는 제도

하지만 문제는 이런 기준 개정이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현재 진행 중인 ‘2025년 으뜸효율 가전제품 환급사업’ 안내문을 보면, 각 품목별로 마지막으로 기준이 개정된 시점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냉장고, 세탁기, TV 모두 2018년을 끝으로 기준이 개정되지 않았고, 제습기의 경우는 2016년 이후 변화가 없습니다.

출처: 한국에너지공단

그 사이에도 시장과 제품은 빠르게 달라졌습니다. 세탁기는 건조 기능이 통합된 제품이 빠르게 확산됐고, TV는 대형화·고해상도화가 가속화되면서 새로운 기능들이 적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효율 등급 제도에 온전히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단일 잣대로 평가해 실제 시장의 다양한 변화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장은 빠르게 바뀌는데, 기준은 수년째 멈춰 있습니다. 이 간극이 커질수록 제도의 신뢰도는 떨어지고, 소비자는 ‘1등급’을 믿기 어려워집니다.


조율된 시계, 꾸준히 작동하는 일본의 제도

우리나라 제도의 또 다른 문제는 구조 자체에 있습니다. 5등급만 넘으면 사실상 별다른 제재가 없기 때문에, 최저 효율 제품도 시장에 버젓이 남아 있습니다.

반면 일본은 탑 러너 프로그램(Top Runner Program)을 운영합니다. 특정 시점에서 시장에 나온 가장 효율이 높은 제품을 기준으로 목표치를 설정하고, 이후 일정 기간이 지나면 기업이 생산하는 전체 제품군의 가중 평균 효율이 그 목표에 도달해야 합니다. 효율이 낮은 제품을 일부 내놓을 자유는 있지만, 동시에 매우 효율적인 제품도 출시해 전체 평균을 끌어올려야 하는 구조입니다.

이 프로그램의 특징은 기준 설정 자체가 정기적으로 이뤄진다는 점입니다. 일본 정부는 약 2~3년마다 대상 품목을 재검토하고, 새로운 기준을 마련할 때는 학계·소비자·산업계가 함께 참여하는 위원회를 통해 1~2년에 걸친 협의 과정을 거칩니다.

반면 한국은 정기적 검토 체계가 없어 시장 변화와 기술 발전이 제도에 반영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꾸준히 태엽을 감는 일본의 제도와 달리, 우리의 시계는 너무 오랫동안 멈춰 있습니다.


우리는 묻습니다

  • 새로운 가전을 살 때, 우리는 여전히 ‘1등급’이라는 숫자를 믿어도 될까요?
  • 전기요금을 아끼려는 우리의 선택은, 지금의 제도가 충분히 뒷받침하고 있을까요?
  • 달라진 기술과 생활 방식을, 효율 등급이라는 한 줄짜리 숫자가 제대로 담아낼 수 있을까요?

효율 등급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소비자가 안심하고 선택할 수 있도록 돕는 약속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는 기준은 그 약속을 지켜주지 못합니다. 기술은 앞으로도 계속 발전할 것이고, 우리의 생활 방식도 달라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도 역시 그 속도에 맞춰 변화하며 신뢰를 쌓아야 합니다.

멈춰버린 시계를 다시 움직이게 하는 일, 그것이 지금 필요한 조정의 출발점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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